무협/SF

色魂 無影客! - 3부 3장

본문

금원상은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황금벌레처럼 나이 오십을 살아 왔건만, 자식도 없고 정신적으로 남은 것은 허전함뿐이었다. 자신의 삶에 남은 황금이라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관료이거나, 학자이거나, 무인이었으면 무한한 이상과 꿈이 있으련만, 그에게는 그런 정신적인 희망과 이상(理想)이 없었다. 




물론 황금으로 못 이룰 것은 없었다. 하지만 황금으로 이룬 것은 허울 좋은 부귀뿐이지, 혼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담담해진 그가 설 무영에게 물었다.




"묵객은 뉘시오?"


"오염된 세월의 강을 건너는 객!"




설 무영에게서는 준비된 듯이 대답이 흘러 나왔다. 금원상은 비소를 흘렸다.




"누구나 그런 것을......!"


"아니........!"




금원상은 부정하는 설 무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


"바로 잡아야지...!"




묵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금원상은 흠칫 놀랬다. 이십 세 약관의 청년이 잘못된 시대를 고친다는 웅대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것이었다. 금원상은 신비스런 흑의의 청년을 다시 한 번 처다 보았다.




"무엇을 원하시오?"


"난, 단지......!"




묵인은 단지! 라고 말하였다. 끝이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금원상은 혹시나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기대감에 되물었다.




"단지라면.......?"


"금장주의 혼이 필요하오!"


"헉…! 호~혼?"




혼이라 함은 목숨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금원상의 얼굴이 겁에 질려 밀납 같이 하얗게 변했다.




"후훗~!"


".......!"




허나 묵인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문득 금원상이 묵인의 미소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떠 올릴 때 설 무영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소! 금장주의 목숨이나 재산은 금장주 본인 것이요."


"그렇다면......?"


"금원상, 당신의 재능(才能)을 사고 싶소!"


"헐…!?"




금원상의 장삿속으로 단련된 재빠른 두뇌가 회전을 시작하였다. 그는 설 무영 앞에 털썩 무 무릎을 꿇고 부복하였다.




"존(尊)! 하명하십시오!"




금원상은 묵인에게서 뿜어 나오는 형형한 정기를 느꼈다 젊은 나이지만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위엄이었다. 설 무영의 영롱한 두 눈이 번뜩였다.




"장주(莊主)는 내 수결(手決)이 있는 전표가 오면 환전해 주면 될 것이요!"


"존(尊)! 복명(復命)!"




그들 사이에는 은밀한 대화가 있었다. 금원상이 부복을 풀고 일어섰을 때에는 설 무영은 사라지고 없었다. 금원상은 생전처음 기쁨에 들떠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대단한 호연지기의 종사 기풍이다.......)




무언의 결의로 가득 찬 금원상의 눈동자는 창문 밖 백설이 깔린 황보전장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황보전장을 나온 설 무영은 백설을 맞으며 소로를 걷고 있었다. 그는 숲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불구의 세 친구와 유라혈사대(琉羅血死隊)의 다섯 사람, 혼마지옥(魂魔地獄)을 탈출한 다섯 사람 등을 만났다. 그리고 모종의 언약을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설 무영이 감숙성으로 다시 돌아 온 세월은 벌써 오년이 지나고 있었다. 허지만 그가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조의 소망도, 부모의 원수도 그 흔적을 알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풀어야 할 문제점만 늘었을 뿐이다. 사부 불망객과 전도련의 은원관계와 소류진의 원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가 없다.




"휴우…!"




설 무영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백설은 설 무영의 답답한 가슴을 더 짓누르듯 세상의 모든 비밀을 덮어 버릴 듯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주먹 크기의 눈송이가 그의 전신에 내려 쌓이며 흑의를 하얗게 뒤덮어 감추고 있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세월을 남겨놓듯 발자국이 길게 그를 따라 오고 있었다. 송림 옆을 걷고 있을 때 사람들의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 무영은 무심코 소리 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명의 궁장 여인을 사이에 두고 일남일녀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네년이 그래도 우리 소당주를 죽이지 않았다고 할 것이냐?"


"......!?"




궁장여인은 이십을 갓 넘긴 여인이었다. 궁장여인을 다그치는 여인은 사십대에 가까운 중년이었다. 중년여인은 풍염한 몸매에 황색비단으로 된 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중년여인의 옆에 있던 백포를 두르고 서있던 오십 세가량의 중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용비귀설공(龍飛鬼楔功)을 무서워 할 줄 아느냐? 이실직고하면은 살생만은 하지 않으마."


"글쎄, 저는 종남파의 소당주가 누구인지 무슨 당주인지도 몰라요."




궁장여인은 억울한 듯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중년여인이 비녀를 품에서 꺼내 흔들며 핍박을 했다.




"요런 앙큼한 년! 소당주가 용비귀침(龍飛鬼針)의 암기에 당했고, 이것이 네년의 비녀 취교(翠翹)가 분명하거늘 시침이 뗄 작정이냐?"


"그, 그건…! 잊어버린........"


"뭐! 이제는 잊어버린 거라고, 발뺌을 할 참이냐?"




궁장여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부정을 하여도 중년여인은 닦달을 하였다.




"정말예요. 잊어버렸어요...."


"안되겠어! 내, 요년을........"




중년여인이 금나수법으로 궁장여인의 완맥을 잡으러 달려들었다. 허나 궁장여인이 의외로 재빠른 신법으로 중년여인의 키를 넘어 반대편에 가서 섰다. 




"헛! 네년이......."




중년여인이 다시 궁장여인의 혈맥을 움켜쥐려 강력한 수법을 썼으나 번번이 궁장여인은 바람 같은 경신술로 피하였다. 중년여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였다.




"어린 것이 무공의 내력이 좀 있다고 본좌를 희롱하려 들어?"




눈발이 약해지고 있었다. 달빛아래 들어난 궁장여인의 봉옥은 백설위에 핀 설화 같은 미모였다.




(어! 어딘가 낯이 익은데....... 누군가?)




설 무영은 궁장여인을 어디선가 본 듯하기에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 속의 여인보다는 성숙해진, 백설같이 하얀 피부에 갸름한 봉옥, 궁장을 걸쳤지만 나긋나긋한 자태는 백설이 깔린 달빛에 월하미인이라 한들 궁색하지 않았다.




허지만 설 무영은 전혀 궁장여인의 신원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궁장여인은 용란궁(龍卵宮)의 가신 수호광(壽昊光)의 여식 은하비선(銀霞妃嬋) 수여빈(壽汝嬪)이었다.




그때였다. 묵묵히 사태를 추이하던 백포의 사나이가 갑자기 뇌격신룡(雷擊迅龍)의 수법으로 수여빈의 가슴을 후려쳤다. 




"흐…악!"




중년여인의 수법에만 신경을 쓰던 수여빈은 의외의 일격에 오장이나 날아가 쓰러졌다.




"이…! 이럴 수가......."




그녀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경악스런 눈동자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네년 때문에 추위에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




백포의 사나이는 재빨리 수여빈에게 다가가 몇 군데의 혈을 짚고 어깨에 둘러매었다. 문득 묵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정심으로 도를 이루어야 할 도인께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을........"


"누구야?"




백포의 사나이가 와락 소리를 지르며 소리가 들린 방향을 처다 보았다. 흑립에 온통 흑의를 걸친 묵객이 나무 뒤에서 모습을 나타내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어찌하여 다가와 있는 그를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문득 궁장여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던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네…! 네놈은 혹시 흑풍야차(黑風夜叉)......?"




궁장여인이 얼떨결에 설 무영의 별호를 뇌까렸다.




"이름은 아무것이라도 상관없다. 그 여인을 내려놓고 말해라."


".......?"




백포의 사나이가 머뭇거렸다. 백포의 사나이와 중년여인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갑자기 나타난 흑객에 대한 생각을 하였다. 흑풍야차라면 단신으로 철마척살대(鐵魔拓殺隊)를 거의 멸살하는 혈겁을 치루고 망혼애(忘魂崖) 아래로 살아졌다가 변황의 지옥철타군(地獄鐵駝軍)을 주살하였다는 기괴한 공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백포의 사나이가 음험한 눈동자로 중년여인을 바라봤다. 백포의 사나이는 슬그머니 수여빈을 내려놓고 비소를 흘렸다.




"흐 흣! 네놈부터 죽여주마!"




의중이 일치된 듯 그들은 한꺼번에 설 무영을 향해 쌍장을 날렸다. 설 무영은 멍하니 부동의 자세로 바라보고만 있는 것에 배포의 사나이는 어이가 없었다.




"허! 이놈 봐라! 죽으려 환장했네."




백의의 괴인은 희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원래 허초를 날리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순간을 모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전혀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것이었다.




"놈! 진짜 죽어봐라!"




백포의 괴인은 급히 공력을 끌어올려 쌍장을 날렸다. 중년 여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장력이 강력한 장력으로 설 무영의 전신에 퍼부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착오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반출한 장력을 맞은 상대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르르... 쾅!




상대의 전신에 부딪친 장력이 더욱 맹렬한 반탄강기로 변해 그들에게 되돌아 오는 것이었다.




"흐 억!"


"크 억!"


"진, 진짜 저승야차........"




외마디를 지르며 옷이 찢기고 피를 쏟으며 오장이나 나가 뒹군 그들은 눈밭을 기어 일어서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몸을 획! 돌리더니 사력을 다해 경신술을 펼쳤다. 




"무…! 무섭다!"




단 일초에 당하였지만 살수를 면한 그들의 그림자가 송림을 넘어가고 있었다. 수여빈은 혈도를 찍혔지만,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보고 있었다. 언젠가 모란장원의 막나니 소장주 소금호(昭錦虎)를 제압했던 사람이다. 은연중에 그녀의 가슴에 남았던 설 무영에 대한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그런 그가 또 많이 변했다.




그런데 그가 피에 굶주린 듯 혈투를 벌이고 다닌다고 풍문으로 떠도는 흑풍야차라 하였다. 그녀는 그가 왜 흑풍야차여야 하는가에 대한 또 다른 의구심이 생겼다.




설 무영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백의의 괴인의 장력에 앞가슴의 의복이 너덜거리며 갈라져 있었다. 연홍빛 유실(乳實)이 선연한 젖가슴이 뽀얗게 들어나 있었다. 그녀는 설 무영이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자 봉옥을 붉혔다. 허지만 일어서려 해도 그녀는 혈이 찍혀 꼼짝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설 무영 또한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녀의 명문혈을 풀어줘야 하는데 여인의 앞가슴을 만지는 모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용서하시오!"




설 무영은 혼잣말처럼 뇌까리며 수여빈의 가슴을 젖히고 짚인 혈도들을 풀어 주었다.




"으…음!"




긴장이 풀리자 급하게 풀린 혈도가 돌아가고 수여빈은 혼절하고 말았다.




"이런.......!?"




설 무영은 더욱 난처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 어두운 야밤에 혼절한 여인을 어찌할지 당황스러웠다. 설 무영은 여인을 들쳐 업었다. 여인의 채취와 온기가 고스란히 등으로 전달되어 왔다. 그는 고공으로 솟구쳐 바람처럼 옥문현(玉門縣)을 향하여 날아갔다.




설 무영이 수여빈을 엎고 도착한곳은 매화반점과 가까운 봉황객점(鳳凰客店). 객점의 어린 점소이가 여인을 업고 들어오는 그를 보고 요상한 눈빛을 하였다.




"방을 드릴 갑쇼?"


"음…!"


"하나요?"




설 무영은 힐끗 점소이를 바라봤다. 점소이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그래, 빨리......."


"지금요?"




점소이는 능청스럽게 처다 보고는 방을 안내하였다. 설 무영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의 신원도 모를뿐더러 이대로 놓아두고 간다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꿈을 꾸듯 초생달 같은 봉목을 살 프시 내려 감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눈을 뜬다면 보석처럼 휘황한 눈동자가 빛나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옥으로 다듬은 가지런한 콧날 아래로 붓으로 그린 듯 붉은 입술이 습기를 머금은 듯 윤기를 발했다. 벌어진 하의 사이로 백삼같이 하얀 다리가 육감적으로 나와 있었다.




‘흠......!’




설 무영은 슬그머니 방을 나와 식객들이 객실로 향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는 입구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떻게 한다?"




그는 잠시 궁리를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개의 식탁에 식객들이 있었다. 하나의 식탁에는 도인차림의 두 노괴가 있었고 다른 식탁에는 다섯 명의 남녀가 모여 앉아 왁자지껄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때, 입구의 문이 덜컹 열렸다. 한 청년과 여인 둘이 입구로 황급히 들어와서 두리번거렸다. 설 무영은 낯설지 않은 그들에게 집히는 것이 있었다. 그가 그들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혹시 동료를 찾지 않나요?"


".......!?"




그들이 설 무영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들은 수여빈을 찾아다니는 용란궁(龍卵宮)의 궁제 진제송(振濟松)의 두 여식인 진소이(振笑姨)와 진소랑(振笑浪), 진소이의 약혼자 능서문(凌瑞雯)이었다. 깜찍한 미모를 지닌 진소이가 불쑥 설 무영의 앞에 나섰다.




"그래요! 우리 언니를 찾고 있어요!"




진소이는 도도한 태도로 설 무영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설 무영은 그녀를 무시하는 듯 문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이리 와 보슈!"


"흥......!"




진소이는 코웃음과 함께 설 무영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일행은 설 무영을 뒤를 따랐다. 설무영이 수여빈이 있는 방문을 열어 젖혔다. 문이 열리고 그들이 객실로 뛰어들었다.




"어 멋! 언니......!?"




침대에 쓸어져 있는 수여빈의 모습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진소이가 몸을 돌려 설 무영을 노려보았다.




"나쁜 자식.......!"


"헉......!"




느닷없이 진소이가 설 무영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설 무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진소이의 주먹질을 맞고 있었다.




"소이야! 그러면 못써......!"


"어! 언니........"




혼절해 있던 수여빈이 침대에서 일어나며 진소이를 말렸다. 진소이가 침대로 달려가 수여빈에게 매달리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난 언니한테 변고가 일어난 줄 알고 얼마나 놀랬는데……."


"괜찮아……! 저분이 도와줘서......."




그들은 다시 한 번 설 무영을 되돌아보았다. 설무영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언젠가 대면한 것 같아서 그가 낯설지 않았다.




"그런줄 모르고 소이가 경솔하였구나.…?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진소랑이 설 무영을 향해 두 손을 맞잡고 예의를 다했다. 그러나 진소이는 입을 삐죽 내밀고 조소를 하였다.




"이 소이의 잘못인가? 저 자가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지......."


"소이야~!"




수여빈이 당황하여 진소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허지만 진소이는 안하무인의 태도로 설 무영을 흘겨보았다. 진소랑이 수여빈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진소랑이 수여빈을 다그쳐 물을 때 능서문이 불쑥 나섰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차라도 한잔하면서 무슨 연고인가를 듣지요."


"그래! 빈아, 괜찮겠지? 은공을 입은 모양인데, 괜찮으시다면 대협께서도 같이 가시죠?"




진소랑은 설무영과 수여빈을 번갈아 처다 보았다.




"저야......!"




긍정도 부정도 아닌 설 무영을 바라보며 수여빈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들은 식객들이 있는 객실로 나갔다. 식탁에 앉자마자 진소랑이 재차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길을 오다가 종남파의 독수괴사(毒手傀士)와 사혈요녀(射血妖女)를 우연히 마주쳤어......."


"그런데......?"




그때 점소이가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능서문이 설무영을 바라봤다.




"난 술을 한잔했으면 하는데 대협께서는 어떻소? 제가 사리다."


"좋습니다!"


"양보채(羊補菜)와 옥호춘(玉壺春)! 다른 분들은.......?"


"좋아요!"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하였다. 진소이가 수여빈에게 다그쳤다.




"그래서 언니........?"


"다짜고짜 나를 붙들고 자기들의 소당주를 죽였다고 핍박하는 거야......."


그들은 수여빈의 이야기에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설 무영은 봉황반점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둠속에는 다시 주먹만큼 큰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얗게 묻어 버릴 듯 내리는 설경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머지않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음식이 도착하였다.




"자…! 한잔 권주하겠습니다."




능서문이 주전자(酒煎子)들어 설 무영의 잔을 채웠다. 설 무영은 덥석 술잔을 들어 비웠다. 그리고 능서문을 바라보았다. 범을 닮은 골격과 부리부리한 눈매, 균형 잡힌 신체와 의기가 가득한 믿음직한 협객의 풍도이었다. 능서문이 다시 설 무영의 잔을 채우며 말문을 열었다. 




"저는 능서문이라 하는 사람입니다. 대협께서는 어찌되시는지.....?"


"무영이라 합니다."


"어느 문파에 속하시는지...?"


"문파라기보다는... 가문의 무학을 이어 받은 촌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야기에 열중이던 세 여인의 시선이 설 무영을 향했다. 능서문이 탁자를 치며 말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사매들도 초면일 것 같은데......."




능서문은 세 여인을 번갈아 가리키며 소개를 하였다. 능서문의 성격은 담백하였다. 설 무영과 눈이 마주친 수여빈이 봉옥을 다홍색으로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찍힌 혈도를 푸느라 들어난 자신의 처녀지체의 젖가슴에 그가 손을 댔다는 생각을 하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공연히 가슴의 옷깃을 여미었다.




"그래서, 언니.......?"




그런 수여빈의 마음을 모르고 진소이가 그녀가 하던 말이 궁금하여 재촉하였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내 취교(翠翹)를 불쑥 내미는 거야......."




다시 그들은 수여빈의 말을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설 무영은 무심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 마시고 있었다. 수여빈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진소이가 설 무영을 힐끔거리고 쳐다보았다. 그녀는 시선이 마주친 설 무영을 무시하듯이 코웃음을 쳤다.




당돌하면서도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는 진소이의 태도에 설 무영은 야준(冶俊)의 혼심화강(昏心花康)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다시 진소이와 시선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 수여빈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진소이가 다시 그를 힐끔 쳐다보며 눈을 흘겼다. 설 무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소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고개를 돌리려던 진소이는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흠칫하였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강렬한 눈빛에 빨려 들어 들어갔다.


몽롱해지는 진소이의 눈동자! 초점을 잃은 그녀의 시선이 설 무영의 입술을 향하여 멈추었다. 그는 전음을 통해 그녀를 최면상태로 만들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혼심화강의 초식을 읊조리고 있었다.




“심연래(心淵來). 심연여(深淵如). 심연래(心淵來). 심연미(深淵眉) 희래몽환미(嬉來夢幻眉). 도래환심몽(渡來歡心夢).......“




설 무영의 입술을 바라보는 진소이의 몽롱한 눈빛! 그녀는 점점 자신의 마음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짧은 순간에 몸이 나른해지는 그녀는 설 무영의 이글거리는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 환각에 빠져 들어갔다. 반복적으로 읊조리는 설 무영의 혼심화강은 그녀만이 들을 수 있다.




“심연래(心淵來). 심연여(深淵如). 심연래(心淵來). 심연미(深淵眉) 희래몽환미(嬉來夢幻眉). 도래환심몽(渡來歡心夢).......“




설 무영의 눈동자 속에 빠져드는 진소이가 허리를 뒤틀었다. 그녀는 환몽의 늪 속에 빠져 든 것이다. 안개 같은 구름 속에 떠올려진 그녀는 발가벗은 남녀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설 무영의 가슴에 안긴 그녀 자신의 나신이었다. 그녀는 처녀지체이면서도 황홀한 욕화에 젖어 들었다.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부스스 자리에 일어선 그녀는 설 무영의 무릎위에 걸터앉았다.




“대, 대협…! 소저를 안아주세요.........”


“..........”




버드나무처럼 흐느적거리는 진소이의 가녀린 허리와 봉긋한 젖가슴! 대화에 열중하던 수여빈의 일행의 시선이 진소이에게 향했다. 그들은 돌발적인 그녀의 행동에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진소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설 무영의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그녀는 서슴지 않고 손을 뻗어 설 무영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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