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SF

색룡오후 - 13부

본문

자향은 연회장을 빠져나와 전각이 만들어준 어둠 속에 웅크리고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제하량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았는지 알 수 없으나 만약 그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그의 목숨은 제하량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렵게 용봉추가에 잠입했는데 이 기회를 날려야한단 말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진행해야 하는가?’


기회란 쉽게 오지 않는다. 이대로 용봉추가를 빠져나가면 다시 들어오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오가혜에게 요음충을 삽입시켜 두었으니 기회를 다시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가 그의 의도적인 접근을 눈치를 채고, 추세중에게 말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것은 사실이었다. 


“여기 있었군.”


자향은 갑자기 등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했다는 것은 악의적인 의도를 품었을 경우 그의 목숨을 취할 수도 있었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놀람의 강도가 상당했다. 


자향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위인을 발견하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언제 나타났는지 제하량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서 있었다. 눈빛이 차가운 것이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은 아닌 듯 했다. 


자향은 일단 그를 모른 척 했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호오, 시치미를 떼시겠다... 설마 어제 본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겠지.”


역시나 제하량은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연회장에서 그를 발견하고 바로 도망쳤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후회하는 것은 자향의 타입이 아니었다. 


자향은 어깨를 쭉 펴고 제하량을 직시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잘 기억하고 있소. 다시 당신과 마주치지 않기를 원했는데 의외의 장소에서 너무도 빨리 다시 만나는군. 나를 추세중에게 넘길 참이오? 그렇다면 순순히 응하지는 않겠소.”


“반항을 하시겠다?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고 있는데도 말인가?”


“그렇다고 순진하게 내 목을 내밀고 베라고 할 수는 없지 않소?”


“자네의 기개가 마음에 드는군. 어제는 눈에 띄면 단칼에 베어버릴 참이었는데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도 당당한 것을 보니 살짝 마음이 변하는군. 그대가 용봉추가에 잠입한 목적을 말한다면 이대로 보내줄 수도 있다.”


자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으나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여전히 독안에 든 쥐였다. 


“결국 네 손에 죽을 바에 입 아프게 떠들고 싶지 않다.”


“날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 제하량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자향은 무턱대고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가 선량하고 정의로운 자라 해도 그 내면까지 그러리라는 확신이 없다. 오히려 착한 척하는 가증스런 위선자들이 무림에는 더 많았다. 단지 지금은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았고 목숨이 걸렸으니 주사위를 던져볼 가치가 있었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용봉추가를 나가기 전에는 날 해치지 않으며, 나의 신분에 대해 비밀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해라. 그렇다면 내 목적을 말해주겠다.”


“네 약속대로라면 용봉추가를 벗어나면 즉시 죽여도 무방한 것이군?”


“이미 한 번 당신의 손을 벗어난 적이 있으니 또 안 되리란 법이 없지.”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네. 좋아, 말하게.”


자향은 사부 외에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기로 했던 비밀을 풀어놓았다. 거짓말로 눈앞의 사내를 속이기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나는 비룡추가의 가주 자의부의 아들이다.”


“...?”


제하량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향은 그 이유를 알고 계속 설명했다.


“무림에는 비룡추가의 식솔들이 모조리 죽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내가 버젓이 살아 있었다. 단지 나라는 존재는 비룡추가에서도 비밀이었기에 나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러한 소문이 가능했다. 나의 존재가 철저히 비밀에 가려진 것은 나의 부친이 자의부이고, 모친이 자의정이기 때문이다.”


제하량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들은 남매지간이 아닌가?”


“왜 나의 존재가 비밀에 가려졌는지 이해가 되겠지.”


자향은 제하량의 눈치가 빨라서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역시나 제하량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부모의 복수를 하기 위해 잠입했겠군?”


“맞다. 하늘 아래 부모의 원수를 살려둘 수는 없는 법, 반드시 추세중을 죽여 부모님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내가 누군지 모르지 않을 텐데...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너무 많은 것을 말했군. 이제 자네의 계획은 무산될 것이네.”


“과연 그럴까? 당신이 내 말을 비밀에 붙여준다면 아직 기회는 남았지. 비록 당신이 날 방해하겠지만 언제까지 용봉추가에 머물지는 않을 테지.”


“하하, 맞네. 사실은 금방 용봉추가를 떠나 무림을 유랑하며 경험을 쌓을 계획이었지. 하지만 자네를 지켜보는 것이 세상에 나가 경험을 쌓는 것만큼 값질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당분간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네.”


“한가한 사람이로군. 자네가 비밀만 지켜준다면 나는 내 계획을 계속 진행하겠네. 약속을 지켜주겠지?”


“그건 약속하지. 하지만 자네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네. 아마도 자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네.”


자향은 내심 비릿한 비웃음을 흘렸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또 다시 자리를 피해줄 테지. 내가 오입질을 할 때 과연 방해할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성인군자처럼 자리를 피하겠지. 그렇다면 내 계획을 방해하기는 어려울 거야. 어찌되었든 다시 기회가 생긴 거로군.’


자향은 휙 돌아섰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얼마나 날 방해하는지 기대되오.”


제하량이 걸어가는 자향의 등뒤로 한 마디 경고를 날렸다.


“명심하게. 용봉추가를 벗어나면 내 손에 죽을 것임을 약속하지.”


“용봉추가에서 늙어죽겠군. 잘 지켜주시오.”


자향은 손까지 흔들어 보이는 여유를 되찾고 오가혜의 전각으로 향했다. 


‘쓸데없는 약속을 했어.’


제하량은 혼자 남자 방금 전 너무 경솔한 약속을 했음을 후회했다. 그러나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은 약속을 했으리라 또한 확신했다. 그만큼 자향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가 용봉추가에 해악을 끼치려하면 제지하면 되겠지.’


제하량은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을 예감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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